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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다시, 길 위에서

스물 네 시간 기차를 타고 독일에서 파리를 거쳐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에는 낯선 곳에 대한 생소함과 들뜸, 설레임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나러 간다. 몸도, 마음도 단단하게. 독일에 있으면서 이번 여행 동안 산티아고 길을 마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삼 주 전, 피터와 엇갈리고 레온역에서 독일로 떠날 때만 해도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근교의 시골 공동체에서 일주일을 보냈을 때, 아침에 눈을 떴는데 떠나야 할 시간임을 느꼈다. 길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지 못한 생각들과 나에 대한 집착들을 좀 더 정면으로 만나고 싶었다.

레온 역에 내려서 배낭을 조여 매고, 호흡을 한 번 크게 한다. 한번 왔던 도시라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웃음이 난다. 삼 주 전에 고작 반나절을 걸어봤을 뿐인데 익숙하다고 생각하다니. 낯설음이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때로 얼마나 쉽고 조급한지 모르겠다. 이런 익숙함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와 다른 것들을 너무 쉽게 짐작해버리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지금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역을 나와서 다시,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달라졌다. 화살표가 있다가 없으면 당황하곤 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느긋하다. 경험이 생긴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걷다보면 언젠가 다시 필요한 때에 화살표를 만나게 될 것을 생장피드포르에서 레온까지의 기억으로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후동안 걷기 적당한 거리를 계산해보니 18키로미터 떨어진 Villar de Mazar, Vallata에 알베르게가 있어서 그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거리상으로는 네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레온을 벗어나자마자 화살표들이 이상하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미친듯이 표시되어 있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거야! 애꿎은 화살표들에게 화를 낸다.


방금 전까지의 느긋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양쪽 화살표를 심란하게 바라본다. 어디로 가야 맞는 길일까. 한 쪽을 선택했다가 그게 더 많이 돌아가는 길이면 어떡하지? 더 좋은 풍경을 놓치는 단조로운 길이면 어떡하지? 아예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산티아고로 안 가면 어떡하지? 수많은 물음표와 불안이 올라온다.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화살표의 갯수가 많아보이는 왼쪽을 택했다. 까짓거,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자. 하고 마음 먹고도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않다.

몇 미터 가다보니 저 멀리 기둥에 노란 표시가 보인다. 아, 제대로 왔구나 하고 안도하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제기랄, 화살표가 양쪽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냐! 아무도 없는데 신경질이 나서 다시 화살표들에게 화를 낸다. 레온 전까지는 화살표가 명확했다. 가끔 가다가 드물게 있어서 찾느라 애먹은 적은 있어도 화살표의 방향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작부터 화살표가 너무 많아서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어느 화살표를 따라가야 할 지, 내가 선택해야 하는 시간들이 시작된 것 같다. 싫다. 그냥 정확하게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거부감이 생긴다.

시간이 여섯 시가 넘었는데, 길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여태까지 이 시간이 되도록 걸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더 어두워지면 어떡하나 조바심도 생기길 시작했다. 지도 상으로 표시된 거리라면 이미 도착했어야 할 시간인데 언덕만 나오는 걸 보면 아까 화살표 방향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어떡해. 지금 와서 되돌아가기에는 늦었다. 하필이면 길에 다른 순례자도 거의 없다. 이상하다.

여덟시. 해가 떨어져 가는 기미가 보일 때 쯤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휴. 늘 그렇듯이 길에서는 나 혼자였는데,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잔뜩 있다. 길고 황당했던 하루에 선물이라도 주듯, 알베르게가 너무 예쁘다. 벽 곳곳에 그 동안 묵었던 순례자들이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놨다. 환상의 세계같다.



침대도 내가 원하는 곳을 아무데나 골라서 자라고 했다. 방도 비어 있지만, 왠지 야외 복도에 깔려 있는 매트에 눈길이 갔다. 야외에서 자는 것은 처음인데, 한번 해 보고 싶어졌다. 안 해봐서 걱정되는 것은 다 해보고 싶어졌다. 좋아. 누웠을 때 머리가 하늘이 보이는 쪽으로 짐을 풀었다. 이 곳에서 아무 아는 이 없이, 나는 다시 시작한다.




+매트에 누워서 본 하늘

레온, 화살표
# by Anita | 2008/12/19 03:14 | 2007, 낯선 길 걷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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