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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ita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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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니타. 길에서 피터와 또 헤어졌다. 아침에 준비가 늦는 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출발했는데, 걸으면서 한 발짝 씩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해서 이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어제 '같이 있을 시간이 얼마 없네 어쩌네' 해 놓고 그렇게 내빼? 하다가도 이 아이의 느긋함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언제 만날 수 있는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다시 볼 수 없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혼자 걷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해서 무리해서 그의 속도로 걷지 않는다. 그렇게 빨리 걷다가는 생각의 속도도, 주변의 풍경도 두 배로 빨리 휙휙 지나가버려 아무것도 못 볼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난 밤 꿈에는 내가 군대를 갔다. 동생인 듯한 어린 남자를 데려다 준 것 같기도 하다. 이 중에서 훈련 안 받은 사람 손 들라고 하길래 손을 들었더니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나는 훈련 대상도 아닌데 뭐야 하면서 나만 여자였는데 훈련을 받았다. 피터가 남자친구에 대해 물어봐서 기하가 군대 있다고 말해줬더니 군대가 나왔나. 자꾸 꿈을 꾼다. 다시 꿈이 말하는 시기가 시작되나보다. 점심 때 쯤에는 피터와 만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시킨 뒤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가방에서 빵을 꺼냈다. 햇빛이 너무 강해 땅을 굽는 것만 같다. 바게뜨 빵에다가 햄이랑 치즈를 얹어 점심을 먹는다. 식성도 참 무난하지. 빵이랑 치즈를 먹으니 밥에 김치를 먹는 것마냥 마음이 편하다. 언제나처럼 요거트와 초콜렛으로 점심을 마무리하고 또 식단 계획을 짠다. 초콜렛을 많이 먹었군. 당분간 안 사야지. 저녁에는 토마토와 오이를 먹겠어. 다른 데는 별 무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발 쪽이 조금 걱정이다. 왼쪽다리가 더 튼튼한데, 왜 왼발바닥이 아픈 걸까? 오른발은 뒤꿈치쪽이 시큰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아킬레스 쪽에 무리가 가는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공들여서 마사지와 요가를 하고 있는 덕에 물집이 생기지는 않지만 이렇게 한 시간 정도 가만 앉아서 쉬었다가 다시 걸을라치면 너무 통증이 심해진다. 점심도 지나고, 오후 네 시가 되도록 걸어도 피터와는 마주치지 못했다. 중간에 마을을 지나면서 길목에 있는 알베르게에 잠시 들러 방명록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명단에 없다. 지나쳐갔음이 분명하다. 조금씩 심술이 나기 시작한다. 에잇, 그래 어디 한 번 가 보라고! 쫌만 기다려주지, 느무하네! 중얼중얼 큰 소리로, 한국말로 피터를 원망한다. 뜨끈한 아스팔트 위, 차 한대 다니지 않는 어느 시골길에서의 오후. 다음 마을에서 쉬지 않으면 더 이상은 못 걷겠다 싶어질 때 쯤 작은 계곡 쪽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피터다. 알리시아, 거샤, 우리의 요르날리스트 로베르토, 로빈, 다 모여 앉아서 쉬고 있다. 아아, 내가 방금까지 길 저 쪽에서 오면서 민망하게 소리친 거 다 듣지 않았겠지. 나의 그 수줍은 솔직한 마음을 변방의 한국어가 숨겨주어 이럴 땐 참 고맙다 고마워. 동그랗게 서로를 베고 누워서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누워 쉬었다. 나도 원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몸을 둥글게 옆으로 눕혀 알리시아에게 기댔다. 로빈은 내 디카를 구경하는게 재밌는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종알거린다. 피터는 혼자 초콜렛 은박종이를 꾸깃꾸깃하더니 나한테 내민다. '칼리, 선물이야' ![]() +로베르토, 거샤, 알리시아, 나 (photo by Robin) 은박지로 만든 코끼리다. 옆에서 다들 이름을 붙이랜다. 흠. 그렇다면 '아니타'로 하겠어. 내 엉터리 스페인식 이름, 아니타란 말에 피터가 쿡, 하고 웃는다. 방금 태어난 '아니타'를 과자 상자에 담아 배를 태워 항해도 하고, 선글라스를 씌워 걷기도 하고, 내 배 위에 올려놓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가방에서 지퍼백 하나를 꺼내서 아니타를 담고, 배낭 바깥 쪽에다 매달았다. 다들 한 번씩 아니타를 쓰다듬고, 다시 우리의 숙소를 향해서 출발. ![]() +아니타, 선글라스 ![]() +아니타, 항해 중 #5. 30미터. 플라타너스가 끝도 없이 직선으로 심어져있는 길을 몇 키로나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놈의 땅은 굽어지지도 않는다. 좀 전까지 다 함께 앉아 쉬었다가 출발했는데, 나는 여지없이 맨 꼴찌다. 가장 젊고 얍삽한 로빈은 쌩 하니 갔고, 로베르토와 알리시아도 다정한 수다를 떨면서 앞질렀고, 다리도 길고 키도 크고 조용한 거샤도 성큼성큼 갔다. 나는 발바닥의 통증을 감지하면서, 어떻게 걸어야 덜 무리가 갈지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이틀 후면 이들과 헤어져 독일로 가게 될 텐데, 정말 헤어져도 괜찮을까, 아니면 페스티벌을 포기하는 것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하다보니 걸음이 조금 빨라졌고, 저 앞에 피터가 혼자 걷고 있는 것이 보인다. 피터, 하고 부를까 하다가 그만둔다. 지금 내가 여기서 달리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리인데 달려볼까 하다가 역시 관둔다.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저 아이와 나 사이의 삼심 미터 남짓한 거리를 생략하지 않고, 걷고 싶다. 힘을 내서 걷는다. 평소 내 걸음보다 조금 빨리, 조금 더 보폭을 크게 해서 걷는다. 몇 걸음 걸으면 거리가 좁혀질 만도 한데 저쪽도 힘차게 걷고 있는지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왠지 오기가 생긴다. 이번엔 내 최대 보폭으로 앞 뒤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걸어본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건 이런 걸음을 두고 하는 말일테다. 그런데, 저 녀석 뒤에 눈도 달려있지 않을텐데 여전히 빠르다. 내가 죽을 힘으로 걷고 있는데도 절대로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뭐가 이런가 싶어서 다시 원망이 나오려고 한다. 우씨, 하는데 씩씩하게 걷던 피터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서 나를 보며 기다린다. 나는,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애써 아닌 척 하며 아무 일 없는 표정으로 그에게로 (열심히) 걸어가 드디어 나란히 섰다. 방금의 신경전은 나 혼자만 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둘이서 느긋한 걸음으로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말이 별로 없던 피터가 '부끄럽지만...' 하고 입을 연다. '부끄러워서 말하기 좀 그런데... 난 너랑 산티아고까지 같이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넌 뭐야, 독일이니, 춤 페스티벌이니 뭐니 하는 곳으로 가 버리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영어는 미 투 정도인데, 그런 말로는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함께 걷고 싶은지 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독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아이와 함께 걷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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