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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고원을 넘어, 시원썰렁했던 부엌에서.


쪽지.
피터는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우리 알베르게에 들렀고, 폴란드에서 온 다른 이들-거샤,알리시아들과 먼저 떠났다. 여럿이 우르르 걷기는 왠지 불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미적거리다가 혼자 출발했다. 어스름한 공기가 햇빛을 머금기 시작하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조용히 걷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한 남자가 내게 가까이 오면서 묻는다. '너 한국에서 왔어?'

'응'

'이 쪽지, 너한테 주래'

엥. 이 길에 한국사람은 나 뿐인가. 쪽지를 받아드니 San이다. 작은 메모다. 본명과 메일 주소, 짧은 인사가 담겨있다. 어제 밤인가? 피터처럼 다른 알베르게에 묵는 그가 내가 있는 숙소에 들러서 전해 주고 갔단다. 너무 늦어서 직접 주지는 못했나보다. 그의 말대로, 길 위에서 만났으니 길 위에서 헤어지자는 거다. 또 인연이 닿으면 보게 되겠지. 일찍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놓고, 새벽 한 시가 되도록 바에서 맥주도 아닌 물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라뇽의 밤을 기억한다. 깊은 눈물샘과 만나시기를.


로베르토.
쪽지를 전해 준 로베르토는 스페인사람이다. 요르날리스트다. 요르날리스트. journalist. 어쩐지 그가 순박해보여 웃었다. 비웃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융Jung까지 나왔다. 그는 내가 융을 아는게 신기했는지 무려 '나이에 비해 지혜롭다'는 말까지 했다. 그에게 융은 그런 의미를 가진 존재인가보다.


다시, 피터.
막 떠오른 해가 눈이 부셔 앞이 잘 안 보일 때 즈음에 피터가 거샤, 알리시아와 같이 앉아서 쉬고 있다. 피터는 나를 보자마자 묻는다.

'오면서 토끼들 봤어?'
'그럼!'

안녕. 드디어 다시 같이 걷게 되었다. 이제는 다섯이다. 나, 피터, 거샤, 알리시아, 로베르토.



'나 어제 꿈 꿨어. 누군가랑 헤어졌거든.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고. 깨고 나서 좀 마음이 아팠어.'

피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준다. 자기 이야기인지는 모르고.


가우디.
길을 가는데 로베르토가 분수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섰다. 우리도 같이 멈췄다.



'가우디야'

오호. 이렇게 소박한 장소에. 우리는 모조리 디카를 꺼내서 찍고 난리가 났다.

'거짓말이야'

결코 가우디라고 할 수 없는 소박한 분수였지만 우리가 그를 믿은 것은 그가 단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우디를 몰라서가 절대 아니다.













고원.
세상의 절반이 하늘인 고원을 지났다.
나는 알고 있는 노래는 생각나는대로 불렀_내질렀다.
태어나서 그런 하늘은 처음 봤다.
그런 지평선도 처음 봤다.
피터는 부르고스부터 레온은 hell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쩐지 신났다.










청소년로빈.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길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숙소가 안 나오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될대로 되란 심정으로 죽도록 걷다 보니 마을이 나오긴 했다. 로베르토와 알리시아는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다. 독일에서 온 불어와 독어를 겸해 쓰면서 영어로 나와 이야기하고 스페인어로 길을 물을 줄 아는 청소년 로빈도 수다를 떨고 있다. 청소년의 무서운 점은, 여기서 잠시 논 뒤 다시 길을 더 간다는 거다. 우리는 지쳐 늘어졌지만.


한국말.
알베르게 부엌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답답하니까 한국말을 했다. 피터가 폴란드말로 응수한다. 둘이서 각자 자국어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논다. 며칠 전까지 길에서 둘이 하고 놀던 가락이 있어서 익숙하다. 거샤와 알리시아가 재밌다고 웃는다.

'혹시 알아듣는 거야?' 하면서.

서로 못 알아듣는 언어를 쓰는 것이 다행이다. 피터의 눈을 똑바로 보고, 한국말을 못 알아들으니 내가 솔직해 질 수 있다고 말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주 짧은 순간, 눈이 말한다. 그는 정말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것만 같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든다.






# by Anita | 2008/04/17 01:46 | 2007, 낯선 길 걷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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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4/17 02: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nita at 2008/04/17 02:59
그랬나봐요. 꼬마 여동생이 된 느낌이었어요.


보자면 볼 수 있는 사이인가요? 나 잘 부추기는데.
:)

저도 피곤해서 곧장 자려했는데, 괜히 여행기 들추다가 보니
자는 건 물 건너 갔네요.

Commented by simplyJH at 2008/04/17 17:06
다시 연재 시작하셨군요!
잘 보고 갑니다...:)
Anita, 이름 참 예뻐요!
Commented by Anita at 2008/04/17 23:19
simplyJH. 네. 마음이 동할 때 아껴놓은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 먹는 마음으로, 때로는 싫어도 꾸역꾸역해야 하는 시험공부처럼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가며 쓰고 있어요.

Anita. 스페인식 이름이라고 우기고 싶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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