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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사십 오 분. 역시나 없다. 피터는 이 숙소에 오지 않았다. 부르고스에 머문다면 거의 이 곳으로 올텐데. 지나쳐 가 버린 것일까? 이제 기다리기에는, 기대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저 멀리서 피터가 나타났다. 커다란 그 DSLR을 목에 걸고서. 어떻게?! 모든 원망과 반가움이 뒤섞인 채 그를 본다. 이 아이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오전 열 한시 반에 도착했단다. 그래서 도시 중심부에 있는 작은 숙소에 짐을 풀었다. 내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을 시간이다. 걷기 시작하자 마자 멈출수가 없었단다. 때로 혼자 걸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 누가 그걸 모르냐 이 자식아. 갑자기 현실감각이 살아난다. 그렇게 속타게 다시 보고싶어했던 내 마음이 우스워진다. 그냥, 그냥 그런 것이었구나. 그렇게 기다리던 피터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나는 반가웠던 마음을 숨기고 무심하게 일기를 쓴다. 피터가 한글을 모르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거샤가 와서 피터와 긴 수다를 떨고 있다. 거샤가 자리를 뜬 동안 우리는 괜히 어색한 안부를 묻는다. 피터가 주머니에서 스위스칼을 꺼내더니 나무테이블에 K를 새기기 시작한다. 말이 별로 없다. 나는 그 'K' 다음에 어떤 알파벳이 오는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다음 알파벳을 새기기 전에 거샤가 왔고, 피터는 테이블 파는 것을 관뒀다. 그 K는 Karli로 이어졌을까? 아니면 그냥 뜻 없는 것이었을까. 물어보지 않았다. 왠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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